[내력벽 철거 리모델링 전후 평면도/자료=국토교통부]
정부가 수직증축 등 리모델링 활성화를 위해 추진했던 ‘내력벽 철거’ 허용 방안을 사실상 철회하면서 논란이 거세지고 있다. 지난 9일 국토부는 공동주택 수직증축 리모델링 시 세대 간 내력벽 철거 허용을 위한 주택법 시행령 개정에 대해 “국민 안전과 관련한 사항으로 세밀한 검토 후 개정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국토부는 국가연구개발사업으로 수행 중인 ‘저비용·고효율 노후 공동주택 수직증축 리모델링 기술개발 및 실증’ 세부과제에 이를 포함, 안전성 등을 정밀 검증하고 결과(2019년 3월)가 나오면 의견수렴 후 허용 여부를 결정할 계획이다.
기술적으로 안전확보가 가능하다는 주장이 있는 반면, 내력벽이 철거되면 하중이 가중돼 위험하다는 주장이 엇갈리는 모습이다. 논란은 지난 1월 국토교통부가 주택법 시행령·시행규칙 개정안을 입법예고하면서다. 개정안을 통해 아파트를 리모델링할 때 안전에 문제가 없는 범위(수직증축 가능 평가등급을 유지하는 범위) 내에서 세대 간 내력벽 일부 철거를 허용, 거주자들이 선호하는 평면으로 바꿀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게 국토부의 입장이었다.
수직증축 리모델링 허용으로 가구수 증가 등은 가능하게 됐지만 기존의 내력벽을 철거하지 못해 평면 설계가 나빠지는 등의 문제가 제기돼 왔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아파트 전면에 배치된 방과 거실 등의 갯수가 2개인 2베이(bay) 아파트를 최근 인기 있는 3베이나 4베이로 바꿀 수 있게 된 것이다. 한국리모델링협회 관계자는 “내력벽을 철거하지 못하면 아파트 평면을 가로로 늘리지 못해 세로로 긴 기형적인 설계가 나온다”며 “내력벽 철거가 가능해야 가로로도 구조를 넓힐 수 있어 채광·통풍 등이 개선된 평면 설계가 가능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내력벽 철거 허용 없던 일로…3년 뒤 다시 논의
하지만 안전 논란이 불거졌다. 내력벽이란 건물의 하중을 견뎌 내거나 분산하기 위해 만든 건축물의 주요 구조부 중 하나로, 단순히 칸을 막기 위해 블록이나 벽돌로 쌓은 벽과는 구분되는 벽이다. 이에 따라 내력벽의 구조를 안전성이 담보된 상태에서 변경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국토부가 지금껏 내력벽의 구조변경을 허용하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 구조건축 전문가는 “구조안전성 측면에서 수직증축이 진행될 경우 기초와 수직부재에 과도한 부담을 줄 수 있는데 내력벽까지 허물게 한다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라며 “리모델링 사업 활성화라는 명분에 매몰돼 국민의 안전이 뒷전으로 밀린 것은 아닌지 고민해봐야 한다”고 꼬집었다.
국토부 연구용역 결과에서도 세대 간 내력벽 철거에 따라 말뚝기초에 하중이 가중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국토부 관계자는 “그동안 세대 간 내력벽 철거방안에 대해 연구용역 등을 통해 검토했지만 안전에 관련된 부분인 만큼 세밀한 검토 후 개정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리모델링협회 “내력벽 철거 재검토 6개월 내 완료해야”
반면 업계와 학계는 내력벽을 철거하더라도 안전성에는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한국리모델링협회는 국토교통부가 공동주택 수직증측 리모델링 시 세대 간 내력벽 철거 허용 결정을 3년 뒤로 미룬 것과 관련해 “재검토할 의사가 분명하다면 6개월 이내 완료해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개정 자체를 백지화하는 것이 맞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어 “공동주택 내력벽 일부 철거는 철거와 함께 충분한 보수·보강이 수반되는 행위임에도 철거 행위만을 단순 부각시켜 국민들에게 리모델링은 안전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심어줬다”고 토로했다.
이인영 한국리모델링협회 기술위원장은 “내력벽 부분 철거와 위치 조정은 건축구조공학적으로 일반 건축물에서 통상 사용되는 기술”이라며 “일부 제기된 우려는 구조기술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부족한 이들이 제기한 불필요한 논란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각 지역 리모델링 추진 주택조합장들은 기술적으로 보완이 가능한 사안에 대해 정부가 탁상행정으로 과도한 규제를 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올 초 세대 간 내력벽 철거가 가능하도록 하겠다는 발표를 한 지 6개월여 만에 이를 원점으로 되돌린 데 대해 일관성 없는 정책이라는 비판도 있다.
강남·분당·일산 등 리모델링 사업 전면 중단 위기
리모델링을 추진 중인 단지들엔 비상이 걸렸다. 대부분의 단지가 내력벽 철거 방식의 리모델링을 추진하고 있어서다. 현재 리모델링을 추진하는 단지는 지난해 말 기준으로 총 35개, 1만 7,703가구이다. 이 중 수직증축 리모델링을 추진하는 단지는 2015년 말 기준 서울에 9개 단지(4,784가구), 경기도에 8개 단지(7,501가구)로 총 1만 2,285가구다. 성남 분당신도시의 경우 △정자동 한솔주공5단지(1,156가구) △야탑동 매화마을 1단지(562가구)와 리모델링 시범 단지인 △정자동 느티마을 3단지(770가구) △정자동 느티마을4단지(1,006가구) 등이 지난해 6~12월 수직증축 안전진단을 통과한 뒤 건축심의 단계다.
원용준 분당 매화마을1단지 리모델링 주택조합장은 “연초 정부의 발표를 믿었는데 현재는 멘붕 상태”라며 “3년을 더 기다리라는 것은 리모델링 사업을 포기하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학수 대치2단지 리모델링 주택조합장은 “정부의 책임없는 결정으로 조합 피해만 가중되고 있다”며 “현재 결정대로라면 사업성이 사라지는 만큼 매몰 비용을 청구하겠다”고 말했다. 이들 단지들은 세대 간 내력벽 철거를 염두에 두고 기본계획을 세워둔 상태로 정부의 이번 결정으로 사업 차질이 불가피해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