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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올림픽 30주년’ 서울, 어떻게 변화 시켰나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의 변화상을 담은 연구서 발간

김길태 기자   |   등록일 : 2018-03-02 17: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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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서울의 도심/자료=서울역사박물관]

평창동계올림픽이 성공리에 막을 내린 가운데 30년 전 서울에서 열린 1988서울올림픽 이후 서울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최근 서울역사박물관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서울의 변화상을 조명한 ‘서울기획연구2-88서울올림픽 서울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를 발간했다. 올림픽 유치가 결정된 1981년 867만 명이던 서울 인구는 올림픽 직후인 1989년 1000만 명을 넘어섰고 ,서울시 예산은 1조 원에서 3조5000억 원으로 3배 이상 급증했다. 도시정비가 급물살을 타면서 도심 재개발 지구는 4.5배, 아파트 건립은 1.8배, 지하철 길이는 10배 이상 늘었다. 88올림픽 이후 야구·씨름 등 프로 스포츠가 창설됐고, 누구나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이른바 ‘마이카’ 시대도 열렸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은 전쟁 이후 폐허 속에서 ‘한강의 기적’을 일군 이후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국제적 도시로 성장해 왔다.

도시정비 통한 도시경관 변화…도심재개발 지구 4.5배, 아파트 건립 1.8배 증가
올림픽 열풍으로 프로야구 등 프로스포츠 창설, 생활체육 등 체육여가문화 정착
유래 없는 경제성장으로 소비 확산…‘마이카’ 시대 열고, 가구당 TV보급률↑

올해는 평창동계올림픽이 열린 해이자 88서울올림픽 30주년이 되는 해다. 서울은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스포츠뿐만 아니라 경제, 문화, 사회 전 영역에서 국제적 도시로 성장하는 거대한 변화와 도약의 시기를 맞았다.

‘88서울올림픽 서울을 어떻게 변화 시켰는가’

서울역사박물관은 서울올림픽 30주년을 맞아 올림픽을 기점으로 세계적인 도시로 성장한 서울의 변화상을 조명한 ‘서울기획연구2-88서울올림픽 서울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를 발간했다.

이 책에는 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김정빈 교수가 주축이 돼 찾은 당시 올림픽 준비상황과 관련된 문서와 기록물은 물론 △‘한강의 기적’과 올림픽의 무대가 됐던 잠실 일대 개발을 중심으로 한 도시공간 변화 △도시경관 만들기 △국민소득 증대에 따른 여가문화 및 생활양식 변화 등에 대한 연구를 진행한 결과를 담았다.

[88서울올림픽 전후 비교(1981년과 1989년 서울의 성장)1/자료=서울역사박물관]

연구자료에 따르면 올림픽 유치가 결정된 1981년 867만 명이었던 서울인구는 올림픽을 치른 직후 1989년 1000만 명을 돌파했고 서울시 예산규모는 1조32억 원에서 3조5585억 원으로 2조 원 넘게 확대됐다. 도시정비사업이 급물살을 타면서 도심재개발 지구는 4.5배(21개→93개), 아파트 건립도 1.8배(1만7060가구→3만802가구) 증가했고, 1개 노선(9.5km)에 불과했던 지하철은 4개(115.3km), 공원은 1578개(188.44㎢)에서 2190개(240.89㎢)로 각각 늘어 도시경관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올림픽 열풍은 프로야구와 씨름 등 프로스포츠 창설로 이어졌고, 시민 삶 속에 체육여가문화가 정착하는 계기가 됐다. 유래 없는 경제성장은 소비 확산으로 이어져 ‘마이카(My Car)’ 시대를 열었고 올림픽 중계를 계기로 여의도에는 각종 특수 방송시설이 마련됐고 가구당 TV보급률도 크게 증가했다.

서울의 중심이 된 한강, 88서울올림픽 개막행사의 무대

1970년대 강남의 확장으로 서울의 중심은 한강으로 재편됐고, 1980년대 더 이상 한강은 서울을 강남·북으로 가르는 경계가 아닌, 시민들의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도시 네트워크도 한강으로부터 뻗어나갔다.

1982년부터 1986년까지 진행된 한강종합개발사업은 한강의 수질을 개선하고, 수로 폭을 확보해 유람선의 운항을 원활하게 하는 한편, 고수부지 일대를 시민공원으로 조성하는 것이 핵심 사업이었다. 그 결과 88서울올림픽의 개막을 알리는 ‘강상제(江上祭)’가 한강에서 이뤄질 수 있었다. 한강 주변의 도로를 확보해 올림픽도로와 강변도로를 확충하고 서울 동서간의 흐름을 원활히 해 김포공항에서부터 잠실 올림픽경기장까지의 교통이 한 번에 이뤄지도록 했다.

[88서울올림픽 전후 비교(1981년과 1989년 서울의 성장)2/자료=서울역사박물관]

후진국에서 선진도시로, 세계인에 미친 서울의 얼굴

1981년 올림픽 유치가 결정된 가운데 서울 도심 곳곳의 판자촌과 노후화된 건물들은 도시 미관을 위해 해결돼야 할 숙제였다. 선진도시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주요 가시권 위주의 도시 정비를 추진했다.

1970년대 일부 진행된 도심재개발 사업이 급물살을 띠게 돼 93개 지구의 도심재개발이 시행됐으며, 특히 김포공항에서 여의도를 거쳐 도심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있는 귀빈로(마포로) 등 주요 간선도로변과 도심 중요 지역에서 재개발이 이뤄졌다. 또한 불량주택재개발사업이 1983년부터 합동재개발 방식으로 활성화됨에 따라 박차를 가해 1985년에는 9개에서 32개 재개발 구역으로 확대됐다.

이렇게 말끔해진 서울의 주요 장소는 마라톤 구간과 성화봉송로로 채택돼 방송을 통해 세계인의 눈에 전달됐다.

“서울대회는 닦아낸 듯이 깨끗한 수도와 활기찬 시민들의 TV 영상으로 완전히 다른 모습의 한국을 세계에 보여줄 터였다.(미국 Newsweek, 1988년 10월10일)”, “한 세대 전쟁으로 황폐화됐던 이 나라는 경제적 강국이 됐다.(영국 Reuter, 1988년 10월2일)”고 각국의 언론은 보도했다.

새로운 삶의 방식 변화, 여가문화와 대중매체의 성장

88서울올림픽의 특수는 유래 없는 한국의 경제성장을 이끌어 냈으며, 이러한 변화는 여가문화의 활성화, 대중문화의 성장 등 서울시민 삶 전반을 바꿔놓는 계기가 됐다. 올림픽 체육 열풍은 1982년 프로야구 출범, 1983년 천하장사 씨름대회 등 프로스포츠의 창설로 이어졌고다. 직장체육인대회, 학생체육, 생활체육 등 시민생활 전반에 체육여가문화가 정착되기 시작했다. 

또 경제적 풍요는 소비 확산으로 이어져 부의 상징이었던 자동차가 생활에 주요역할을 담당하는 생필품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고, 어디든 자유롭게 여행과 여가를 즐길 수 있는 ‘마이카(My Car)’ 시대를 열었다.

특히 88서울올림픽대회의 방송을 주관하는 기구인 국제방송센터(IBC)가 여의도에 세워져 각종 특수 방송시설들이 마련됐고, 88서울올림픽의 경기를 전 세계에 방송했다. 이를 바탕으로 국내 TV, VTR 시장도 동반 성장해 1981년 가구당 TV 보급률은 1981년 0.18에서 1989년 1.04로 크게 증가했다.

[숫자로 본 88서울올림픽/자료=서울역사박물관]

서울을 심층·탐구하는 ‘서울기획연구’ 주제별 내용 담아

한편 서울역사박물관은 이번 연구 결과를 반영한 기획전 ‘88서울올림픽 30주년 기념 특별전’을 오는 7월 서울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개최할 예정이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서울 역사에 대한 시의성 있는 주제를 선정해 심도 있게 살펴보는 ‘서울기획연구’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이와 함께 ‘서울기획연구1-경강 광나루에서 양화진까지’를 동시 발간했다.

‘서울기획연구1-경강 광나루에서 양화진까지’는 조선후기 경강(한양에 속한 한강으로 양화진에서 광나루까지를 지칭)을 중심으로 역사지리, 경제, 사회, 민속, 문학, 회화 등을 심도있게 다룬 연구서로, 고동환 KAIST 교수, 이현군 서울대 국토문제연구소 연구원, 유승희 서울시립대 강사, 김태우 경희대 강사, 이종묵 서울대 교수, 윤진영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이 공동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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