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그렌펠타워(Grenfell Tower) 화재 모습/자료=www.carbonbrief.org]
지난 14일, 영국 런던 그렌펠타워(Grenfell Tower)에서 치솟은 불길은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4층에서 시작된 불은 순식간에 24층까지 번졌고 이 화재로 최소 79명이 숨지거나 실종되었다. 사전에 주민이 여러 차례 제기한 안전 위험 우려를 소방당국과 정부가 무시한 예고된 인재였다. 이 아파트는 1974년 완공돼 스프링클러가 없고 화재 경보기는 작동하지 않았으며, 건물 개선작업 때 외벽에 부착한 합성피복 때문에 불이 쉽게 번졌다. 우리나라에서도 2010년 부산 해운대 마린시티에 있는 주거용 오피스텔에서 화재가 발생했는데, 4층에서 시작한 불길은 바람을 타고 수직 통로를 통해 38층까지 급속하게 번져 큰 피해가 있었다.
이 사고 이후 정부는 관련법 개정을 통해 준·초고층 건물의 기준을 바꾸고 방화·피난 관련 사항 등을 꾸준히 강화해 왔다. 30층 이상 건물 외벽에는 불에 잘 타지 않는 난연재·불연재 소재를 쓰도록 했고 초고층 건물은 30층마다 피난안전구역을 설치하도록 했다. 소방법 시행령에서 6층 이상의 건물은 스프링클러 설치가 의무화되고 건축기준법 시행령에서는 11층 이상 부분은 천장이나 벽 등에 사용되는 부재에 따라 100~500㎡마다 불꽃과 연기를 막는 방화구획을 설치하도록 하고 있다. 2012년에는 초고층재난관리법이 제정돼 50층(높이 200m) 이상 건축물도 화재 규제가 마련됐다. 지난해 11월에는 국토교통부가 고층 건물을 지을 때 재난 발생 시 피난·대피방법 등을 사전에 평가하도록 하는 ‘제2차 건축정책 기본계획’을 확정하기도 했다.
런던 화재를 계기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들은 고층 건물에 대한 화재안전 대책 마련에 착수했다. 국민안전처는 지난 21일 국토교통부와 공동으로 민·관 합동회의를 열고 8월 말까지 ‘고층 건축물 화재안전 종합개선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안전처는 건축·소방·재난관리 분야 등의 전문가와 지자체가 참여하는 ‘고층 건축물 안전개선 기획단’을 구성해 분야별 개선과제를 발굴한다는 계획이다. 또 7월 20일까지 전국의 모든 고층 건물에 대해 특별 소방안전점검을 실시해 종합개선 대책에 반영할 예정이다. 류희인 국민안전처 차관은 “영국에서 발생한 대형 화재사고가 우리나라에선 절대 발생해선 안 된다”며 “기획단에서는 국내 건축물의 특성과 소방안전관리 기준, 운용 실태, 지휘·지원 체계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고층 건축물의 불안을 근본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
안전처와 시·도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30층 이상 고층 건물은 전국에 3,266개 동이 있다. 2010년 753개 동에서 6년간 4배로 늘었다. 이 가운데 50층 이상이거나 높이 200m 이상인 초고층 건물은 107개 동이다. 사정이 이렇지만 25층 이상 아파트를 진화할 수 있는 굴절사다리차(70m)는 서울과 부산에 1대씩 전국에 2대뿐이다. 재난안전 전문가들은 “현재 장비로는 30층 이상 아파트와 고층 건물에 화재가 발생했을 경우 소방관이 직접 진입하는 것 외에 사실상 대책이 없다”며 “고가사다리차 등 장비 확충도 필요하지만 초기 대응역량을 강화하고 피난·방화설비, 건축물 내·외장재 등 고층건물에 대한 심의 기준 및 안전점검을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해운대 마린시티 전경/자료=부산시]
초고층 건축물에 화재가 발생하면 화염이 수직상승하면서 급격하게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 연기가 계단과 엘리베이터를 타고 삽시간에 번지는 이른바 ‘굴뚝 효과(stack effect)’가 발생해 불이 나면 불길이 순식간에 위층으로 번지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특히 초고층 건물은 전기·가스 등 화재 원인으로 지목되는 에너지 사용량이 많고 일반건축물에 비해 내장재, 실내장식품, 바닥재 등이 많이 사용돼 화재 시 다량 가스가 발생할 수 있다. 화재 시 피난 경로가 길어져 대피시간이 지연될 수도 있다. 또 외부 유리 구조로 유리가 파손될 경우 외부공기 유입으로 단시간 내 불이 크게 번질 수 있으며 소방관들의 화재 진압에도 한계가 있다.
지난 2000년 이후 국내의 초고층 아파트들은 최신식 외관과 조망을 확보하기 위해 투명 유리나 반사 유리를 사용해 빌딩 외벽을 커튼처럼 덮는 ‘커튼 월(curtain wall)’ 공법을 적용하고 있다. 이 공법은 첨단 건물 이미지의 외관과 단순한 시공 방법으로 공기(工期)를 단축할 수 있어 인기를 얻기 시작했는데, 초고층에서 바람의 세기가 강하고 물체가 밖으로 떨어졌을 때 지상에 가해지는 충격이 큰 탓에 밀폐나 부분 개폐 방식의 창문을 사용한다. 문제는 이 통유리의 외벽으로 인해 온실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공기조화나 냉난방 환기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에너지를 투입해야 하기 때문에 에너지 소비가 많을 수밖에 없다.
또한 엘리베이터 이동 거리가 길고 고속 엘리베이터가 설치되는 만큼 시공비뿐 아니라 유지·보수에 많은 비용이 들어가 관리비 부담이 크다. 뿐만 아니라 유리 빌딩들은 한낮에 햇빛을 쏟아내는 거대한 반사경이 되어 인근 아파트 주민들을 괴롭힌다. 이들이 내뿜는 반사광으로 인한 눈부심은 수인한도의 최대 2,800배라는 조사 결과가 나올 정도이고 일시적인 시각 장애를 일으키는 수준이다. 이 때문에 피해를 보는 아파트는 실내 온도가 3도가량 오르고 아침저녁으로 반사광을 피하기 위해 커튼을 치고 생활해야 한다.
미분양 우려도 제기된다. 초고층 아파트는 분양 당시 시세 차익을 노리는 세력으로 인해 초반에 과열 현상을 보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수그러드는 경우가 많다. 마린시티에 자리 잡은 80층 높이의 해운대 두산위브더제니스 아파트는 한때 수요자들이 높은 관심을 보였지만 미분양 가구가 많아 한동안 고전했다. 때문에 시행사 측은 미분양 물량을 해소하기 위해 입주자들이 2년 살아본 뒤 주거 여부를 결정하는 조건부 분양을 실시했다. 58층 높이의 인천 청라 푸르지오의 경우도 현재 미분양 물량이 많이 남아 있는 상태다. 마찬가지로 지난해 분양 당시 높은 청약 경쟁률을 기록했던 엘시티 더샵도 아직 미분양 물량이 남아 있다.
최근 국내에선 주거용 초고층 아파트가 대세가 되고 있지만 이는 세계적 추세와는 역행하는 상황이다. 실제 가까운 일본과 유럽의 경우 저층 위주의 건물이 대부분이며, 아파트는 역설적으로 저소득층이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의 아파트만 높은 분양가로 책정되면서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다. 외국의 경우 초고층 아파트 상당수가 업무상업시설 위주다. 반면 한국은 주거용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전문가들은 50층 이상 초고층 아파트들이 사실상 재건축이 쉽지 않아 향후 투자가치는 높지 않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