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투어리스티피케이션 현상에 몸살을 앓고 있는 지역들은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바로 한옥마을과 벽화마을이다. 전자와 후자 모두 오래된 주거 형태를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주거지역이다. 획일화된 주거 형태에 갇혀 있는 현대인들은 정형화되지 않은 공간에 대한 갈망으로 고즈넉하고 오래된 정취를 지닌 옛 마을들을 찾고 있으며, 이곳들은 지나친 상업화와 소비가 중심이 된 관광지를 대신하는 새로운 관광명소로 부상하는 중이다.
대표적인 한옥밀집지역인 북촌은 오래전부터 관광 유명세에 시달리면서 주민들이 불편을 호소하고 있다. 서촌과 익선동 한옥마을도 별반 다르지 않다. 사람들이 몰리면서 기존에 주민들이 이용하던 작은 상점들은 높은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쫓겨나고 남겨진 주민들은 관광객들의 소음과 쓰레기 투기, 사생활 침해 등의 문제에 시달리고 있다. 서촌이 관광지로 본격적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2012년 이후 지역 인구는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서촌보다 먼저 관광지화가 됐던 북촌은 상업시설들이 주거지로 밀려들어오면서 많은 수의 주민들이 집을 팔거나 세를 주고 떠났다. 이처럼 투어리스티피케이션 현상은 한옥마을은 의례적으로 겪어야 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화마을 ‘물고기 계단’ 훼손 전·후 모습/자료=urban114]
개발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모여 살던 달동네에 지자체의 도시재생사업이 진행되면서 활기가 돌자 관광객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이화동 벽화마을과 부산 감천마을이 있다. 혜화역과 동대문역 사이 낙산공원 아래 위치한 이화마을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판자촌을 바탕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원단·봉제 등 의류산업이 국가 경제를 주도하던 1970~80년까지만 하더라도 이화동은 동대문 도매장 인근에 위치해 활기가 넘치는 지역 중 하나였다.
그러나 국가 기반산업이 자동차, 철강, 조선 등 자본집약적 산업으로 이동하면서 이화동의 가치는 하락했다. 고지대라는 물리적 환경과 불편한 교통시설, 인근에 위치한 문화재로 인한 주택 증축이나 수리의 어려움은 마을의 지역환경을 열악하게 만드는 요건들이었다. 더 좋은 생활환경을 찾아 마을을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노년의 주민들이 주로 마을에 남게 되었다. 이후 저렴한 임대료를 찾아서 외국인 노동자, 유학생 등이 마을에 자리 잡게 되었고 이화동은 과거의 1970~80년대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마을이 됐다. 서울의 중심인 사대문안에 위치하고 있지만 이러한 제약으로 인해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한 소외지역으로 남겨진 것이다.
이런 이화마을이 2006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추진한 공공미술 시범사업의 일환인 ‘낙산 프로젝트’를 통해 이화동 벽화마을로 탄생하게 됐다. 2006년 문화나눔의 해를 맞이해 문화체육관광부는 소외된 지역의 시각적 환경 개선을 통한 사회 취약계층에 대한 문화복지의 실현을 목표로 공공미술 정책 사업을 추진했고 그 결과 마을 곳곳에 역 70여 점의 그림과 조형물이 탄생했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그려진 벽화와 계단 위 그림은 국내 관광객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 등지의 외국 관광객들에게도 알려져 관광 코스로 자리 잡았다. 이화동 벽화마을은 사실상 국내 마을 벽화사업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고 전국 각지의 벽화마을 조성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사업 이후 유지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벽화마을을 방문하는 관광객들로 인해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발생했다. 마을이 관광지가 되면서 고성방가 등 소음과 쓰레기 투기 등 사회적 문제가 발생했다. 불법 주차로 인한 혼란과 소동이 발생하고 일거수일투족 타인의 카메라에 사생활이 노출되는 등 지역주민들에게 편안해야 할 거주 공간이 침해받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지난해에는 일부 주민들이 지역 명물이 된 벽화를 고의적으로 훼손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일명 해바라기 계단, 물고기 계단이 일부 주민에 의해서 연이어 지워졌다. 이후에도 이화동에는 낙서와 같은 고의적인 파괴 현상인 반달리즘(vandalism)으로 인해 훼손된 벽화가 증가했다.
[이화1 주택재개발 구역 위치도/자료=서울시]
이화마을의 갈등은 경제적 이해관계와도 무관하지 않다. 낡은 성곽마을이었던 이화마을 1만 3,889㎡은 재개발 대상지였다. 당초 11층 고층 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었지만 서울 성곽과의 인접성, 이화장 등 지역 인근에 위치한 문화재 등의 이유로 5층 이하 저층 친환경 단지로 계획이 수정되면서 사업성이 낮아 지난해 1월 조합이 해산됐다. 이후 서울시는 주택환경 개선 등을 지원하는 재생사업을 주민들에게 제안했고 벽화 조성사업 이후 관광객 유치에 성공하면서 지역경제 활성화를 이끌었지만 그 수혜가 일부 주민들에게만 돌아가면서 갈등이 시작됐다.
초기 개발이익을 기대했던 건물주들은 크게 반발했으나 임대료 상승 등으로 적정 수준의 관광화를 찬성하고 있으며, 상인들 또한 관광객 유치를 통해 수익이 늘었기 때문에 재생사업을 지지하고 있다. 반면 거주민들은 관광객 유입으로 인해 실질적인 정주권을 침해받으므로 재생사업을 반대하고 있다. 도시재생사업 대상인 노후 주거지는 이화마을처럼 오랜 기간 추진해 온 재건축이 무산돼 주민 간 갈등의 골이 깊은 경우가 많다. 벽화 훼손 이후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주민 간 갈등의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감천문화마을 전경/자료=부산시]
‘한국의 산토리니’로 유명해진 부산 감천마을은 병풍처럼 산맥이 둘러싸고 있고 앞으로는 바다가 펼쳐져 있는 수려한 자연환경을 지닌 지역이다. 감천동은 한국전쟁 때 피란민들이 판잣집을 짓고 살았던 허름한 달동네였다. 이곳은 60도에 이르는 가파른 경사면에 형성된 지형적인 이유 때문에 부산의 다른 지역들과는 달리 단절돼 고립된 공간이었다. 게다가 상하수도 시설을 비롯한 도시기반시설이 전무했던 초기 정주여건의 열악함은 거주민 수가 3분의 1가량 감소하고 빈집의 수가 250채가 되는 등 마을 공동화와 지속적인 인구 감소의 원인이 됐다.
감천문화마을이 달동네에서 부산의 관광명소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도시재생 덕분이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마을이 가진 지역환경 경관과 장소성의 가치가 인식되기 시작했고, 지난 2009년 문화체육관광부의 ‘마을미술 프로젝트’에 선정돼 학생과 작가, 주민들이 합심해 마을 담벼락에 그림을 그려넣고 조형물 등을 설치하는 등 지금의 감천문화마을로 변신하게 됐다. 이후 ‘레고마을’, ‘한국의 산토리니’, ‘한국의 마추픽추’ 등으로 불리고 있는 감천마을은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도 주목하고 있으며,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도시재생 모델이 되기도 했다.
관광명소가 된 다른 주거지역과 마찬가지로 감천마을 또한 관광객으로 인한 몸살을 겪었다. 이에 지난해부터 감천마을은 관광객을 대상으로 부분 유료화를 시행하고 있다. 수익금 전액은 마을 주민들의 복지를 위해 사용된다. 이는 사생활 침해, 소음, 쓰레기 등 관광으로 발생하는 불편에 대한 보상 정책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보상 정책에도 불구하고 감천마을 또한 외지인들의 부동산 투기로 인해 상가 임대료가 10배 이상 상승하고 주택 가격이 크게 오르면서 투어리스티피케이션 현상이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