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성장기와 저성장기의 지향점과 특성/자료=urban114]
저성장의 시대가 왔다. 고도성장에 익숙한 우리에게 저성장은 낮선 상황이다. 하지만 저성장의 징후는 이미 우리 사회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경제성장이 둔화되고 저출산·고령화는 빠르게 진행 중이며 경제, 인구, 사회활동, 국가 재정뿐만 아니라 토지·주택시장과 도시공간 정책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 1960년대 우리나라의 도시정책은 줄곧 고도성장 시스템이 맞게 유지돼 왔다. 도시 외곽에서의 대규모 신도시 개발과 노후 주거지에 대한 재개발사업, 주택 및 도시 인프라의 양적인 공급 확대는 고도성장을 뒷받침하는 정책이자 고도성장기라서 가능했던 방식이었다.
하지만 저성장기에는 고도성장기에 가능했던 토지·주택의 양적인 공급 확대와 개발이익에 근거한 재개발사업, 공공에 의한 인프라 확충과 관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된다. 최근 들어 개발이익에 근거해 추진되던 뉴타운이 사업성 악화로 더 이상 추진되지 못하고 재개발구역에서 해제되는 초유의 상황이 발생하고 있으며, 학교·공원 등 공공 인프라를 공공의 재정만으로 확충·관리하는 데 한계에 봉착하고 있다. 저성장·고령화에 따른 복지수요의 증가와 이로 인한 도시 재정의 악화, 사회적·공간적 양극화 심화는 도시정책 패러다임의 근본적인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저성장기로 진입한 현 시점에서의 정책 과제는 고도성장기에 맞춰진 기존의 도시정책 기조와 시스템을 저성장기에 맞게 어떻게 전환시킬 것인가 하는 점이다. 저성장 시대의 도시정책은 규제 완화와 개발이익 등 고도성장기에 가능했던 개발 메커니즘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기제하에서 작동할 것이다.
[저성장기 도시 메커니즘과 주요 이슈/자료=urban114]
특히, 우리나라 저성장은 경제·인구·사회 등 도시 전반에 걸친 활력의 둔화로 나타난다. 문제는 이러한 경향이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장기적인 경향성을 갖는다는 점이다. 저성장은 경제적 측면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므로 경제성장의 둔화와 저출산·고령화 등을 함께 고려해 검토할 필요가 있다.
경제성장 둔화에 따른 고용 불안과 소득 감소는 사회적 격차를 심화시킨다. 소득 감소로 구매력이 저하되고 개발수요가 감소하면 앞서 언급한 뉴타운과 같은 재개발 등 정비사업이 정체되거나 추진할 수 없는 지역이 나타난다. 이 경우 정비사업이 정체되는 지역과 물리적인 환경 개선이 이루어지는 지역 간에 공간적 격차가 심화되고 양극화된 기성 시가지를 관리하는 문제가 도시관리의 주요 이슈로 등장하게 된다.
저성장에 따른 개발수요 감소는 도시 인프라와 재고주택 관리에도 영향을 미친다. 개발수요 감소는 도시 인프라의 개·보수를 지연시키고, 각종 도시 인프라와 주택의 노후화를 조장한다. 특히 서울은 1970~1980년대 고도성장기에 공급된 도시 인프라와 주택의 정비 시점이 한꺼번에 도래함에 따라 기존의 도시 인프라와 주택재고를 어떻게 유지·관리할 것인가가 이슈가 된다.
한편 저출산·고령화는 주택시장의 수요 변화에 영향을 미친다. 구매력이 있는 주택 수요층이 감소하고 한동안 저금리 기조가 지속되면서 주택임대시장이 월세 위주로 재편되었다. 인구구조가 변화함에 따라 생활 서비스 시설의 수요도 변화하고 있다. 학령인구가 줄어들면서 유휴 학교시설은 늘어나는 반면, 의료·복지 등 고령자를 위한 생활 서비스 시설은 부족해지는 불부합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생산가능인구의 감소와 고령화는 경제성장 둔화에 영향을 미치고 복지수요 증가와 맞물리면서 공공재정에 부담으로 작용한다. 개발 재정의 부족으로 대규모 외연적인 개발이 어려워지는 반면, 기존 도시공간과 인프라를 활용한 역세권 위주의 집약적 토지이용 요구는 늘어나게 된다. 이와 같이 저성장기 경제와 인구 변화는 각종 개발사업 및 부동산 시장의 침체, 사회적·공간적 양극화, 토지이용 등에 영향을 미친다.
저성장의 모습은 이처럼 다양하게 나타난다. 경제성장률이 떨어지는 것뿐만 아니라 인구·사회 전반에 걸친 활동이 둔화된다. 저성장에 적절히 대응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우리나라의 저성장 모습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저성장의 단면만을 보지 말고 인구·사회·정치·경제를 아우르는 균형 있는 시각에서 저성장을 바라보아야 하며, 저성장기에는 고도성장기 도시개발 과정에서 소홀히 했던 포용적 성장, 분권, 대도시권 차원의 협치 등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성장이 둔화되고 인구 감소와 고령화가 심화되면서 도시공간에서도 많은 변화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고도성장기에는 지가가 계속해서 높아졌지만 개발수요가 감소하면 더 이상의 지가 상승은 어려울 것이다. 이에 따라 대규모 개발사업이나 주택·부동산 시장에 대한 투자수요가 줄어들고 주택시장도 실수요자 중심으로 전환될 것이다. 특히 주택수요가 점차 다양해지면서 기존 공급자 위주의 공급 방식은 수요자 중심으로 전환될 것이다. 따라서 양적인 신규 공급보다는 기존 주택이나 시설을 체계적으로 유지·관리해 질적인 수준을 높일 필요가 있다. 도시공간적으로도 외연적 확산에 비중을 두기보다는 기성 시가지 재생을 위한 수법들을 적용하고 사회적 합의에 기초한 도시정책을 추진할 필요가 있으며 저성장 시대의 여건 변화에 대응하는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