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경도5부와 용산/자료=용산공원조성추진기획단]
용산공원 예정지는 1953년 8월부터 현재까지 북측부지(793,392㎡)와 남측부지(1,884,306㎡)로 구성된 미군기지로 사용되고 있으며 과거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의 병영으로 활용된 곳으로 근대 한국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다. 또한 서울의 중심에 위치해 있고 북으로는 북한산과 남산이, 남으로는 한강을 거쳐 관악산으로 이어지는 서울의 녹지축의 중심에 있다는 지정학적 특성이 가지고 있다.
조선시대의 용산은 과거 서강·마포·두모포와 함께 한강 수운을 통한 전국의 물자 집결지였다. 용산에는 군량미 조달을 위한 둔전과 군수 식품의 저장·출납을 담당하는 군자감이 있었으며, 선혜청의 창고인 만리창이 있었다. 또한 기와와 벽돌을 만들던 와서가 위치해 있던 곳이다. 이처럼 남산을 배후로 하여 도성과 인접하고 한강 일대의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할 수 있는 용산은 외침과 함께 외국군의 주둔지로 사용되는 비운의 장소로 전락하게 되었다.
시 기(단계) |
내 용 |
군 주둔기 기지의 상설화 내·외 경계확정 (1906년~1915년) |
- 러일전쟁(1904년) 이후 300만평 수용, 철도기지 및 군사기지화 - 1906년 5월11일 임시건축부 개설, 1909년 8월 병영시설 구축 - 1908년 10월 필동의 한국주차군사령부를 용산으로 이전 |
전투기지에서 침략전진기지로 전환 부대 재배치 (1916년~1942년) |
- 일본군의 조선상주군화로 조선에 2개 사단 신설, 1919년~1931년까지 제20사단의 완성과 재배치 완료 - 1921년 사단 편제 완료, 기병중대, 야포병중대를 연대 규모로 확장하고 공병중대를 대대규모로 확장 - 1931년~1942년 중국침략과 전시동원 기지로 확장 |
지원기지로의 변화 (1942년~1945년) |
- 태평양전쟁과 용산기지의 공동화(1942년~1945년) - 일본의 본토결전 지원부대의 심장으로 용산(1945년)이 됨 |
[일본에 의해 점령당한 용산의 시기 3단계 구분/자료=문화재청]
13세기 고려 말에는 고려를 침략한 몽고군의 병참기지로,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을 때는 왜군의 보급기지로, 청일전쟁 이후 청나라군과 일본군이 주둔하였고, 러일전쟁과 함께 1908년 조선주차군사령부가 주둔하면서 일본의 무력에 의한 조선 지배의 근거지가 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용산 일대는 물류와 군(軍)기지를 중심으로 한 병영신시가지로 조성되었으며, 인접한 후암동과 청파동 일대의 일본인 거주지와 함께 병영상권이라고 불릴 만큼의 독립적 성격을 강하게 유지하게 되었다.
해방과 함께 1945년 9월 한국에 진주한 미 24사단이 일본군 기지를 접수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용산기지는 미군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일본군 주둔하의 용산은 주변의 일본인 거주지와 함께 조선인의 주 생활지와 일정 부분 격리되어 있었으나 해방 이후 미국군 주둔하의 용산은 서울 시민의 생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1970년대 강남 개발과 1980년대 동작대교 건설 및 4호선 개통 등을 계기로 용산지역이 서울과 소통할 기회가 있었으나 무산되었고, 1991년 미군 골프장이 반환되어 용산가족공원이 조성되었으며 1993년 북측부지 일부가 반환되면서 전쟁기념관이, 1995년 구 조선총독부 건물이 전격적으로 철거된 이후 새로운 국립중앙박물관이 조성되면서 용산의 변화와 미군기지의 이전은 사회적 현안으로 대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