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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의 공간적 비효율성/자료=Hermann Knofalacher, Walk 21 Conference Presentation, 2013]
보행자를 위한 도시, 즉 보행도시는 단순히 걷기 편한 도시라는 의미를 넘어 여러 가지 사회적 의미를 가진다. 지금까지 많은 도시정부에서는 보행자와 관련 사업을 시행해왔고, 관련 조례를 신설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특히 최근 들어서는 보행우선구역이나 보행자우선도로, 차없는 거리 행사 등 보행관련 정책의 다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도시정부의 다른 측면에서는 보행환경의 개선과는 동떨어진 사업이나 정책이 추진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보행 관련 정책의 수행이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차원에서만 시행되고 있으며, 도시 정책의 추진과정에 있어서 종합적인 정책목표를 설정하고 관련된 부문에 일관성을 가지고 적용하지 못하는 것에 상당 부분 기인하고 있다. 개별적인 시범사업이나 행사 등도 큰 의미가 있으나 실천적인 보행정책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정책목표를 명확하게 해야 한다. 보행환경은 단순히 보도를 개선하는 것만으로는 나아지지 않는다. 관련된 많은 부처와 입장을 함께 고려하고 유관사업과 정책을 종합적으로 조율하지 않으면 실질적인 보행환경은 유의미한 수준으로 개선되지 않을 것이다.
도시계획과 보행정책: 특히 도시계획, 지구단위계획 등 공간을 다루는 계획에 있어서 보행자를 고려한 계획의 수립 및 정비가 필수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보행으로 걸어갈 수 있는 거리는 육체적인 능력에 따라 한정되어 있다. 따라서 도시전체의 관점에서는 개별적인 보행권을 어떻게 설정하고 연결시켜줄 것인가에 대한 기획이 필요하다. 하나의 지구 내에서도 보행자들의 보행네트워크를 주변의 용도와 밀도, 보행량 현황 등의 자료를 기반으로 공간적인 사업우선순위와 개선방향이 제시되어야 한다. 보행자 전용도로나 보행자우선도로, 보행우선구역, 도로다이어트 등등 보행환경 관련 사업들이 정부부처의 시범사업이나 공모사업이 나오는 대로 때에 따라 결정되고 진행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전반적인 공간계획과 함께 고려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의 도시계획이나 지구단위계획 등의 공간계획이 수립되거나 정비되는 경우 보행자를 위한 공간계획이 이루어지도록 충분한 자료조사와 기획이 수반되어야 한다.
대중교통과 보행정책: 보행권역이 설정되면 이러한 개별적인 구슬은 대중교통체계를 통해 꿰어져야 한다. 대통교통체계에 대한 계획과 보행네트워크의 계획은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정합성을 가져야만 한다. 보행자에게 대중교통수단은 양적인 확보 못지않게 질적인 수준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다. 대중교통 이용 시에 나타나는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 수준은 곧 승용차교통으로의 대체수요에 크게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쾌적하고 안전한 대중교통은 급가속, 급회전 등의 운동쾌적성, 공기질, 소음 등의 환경쾌적성 등 대중교통수잔 자체의 질적 문제뿐만 아니라 승하차, 환승 등을 고려한 공간의 질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건축물과 보행정책: 보행자를 위한 정책은 보도를 개선하거나 가로를 바꾸는 것에 국한된 것으로 생각하지 쉬우나, 사실은 건축물이 큰 몫을 하게 된다. 보행자가 걷고 싶어하는 길은 그에 상응하는 건물군이 있어야 한다. 건축물의 규모나 파사드(건물전면), 건축물 앞의 전면공간이 어떠한 구성인가에 따라 보행자의 보행수요, 만족도는 달라질 것이다. 가로를 압도하는 대규모의 상자형 건축물, 가로와는 연계할 내용이 없어 폐쇄적인 전면을 보이고 있는 건축물, 보도를 가로지르는 주차공간이 가득한 건축물의 전면공간은 보행환경을 악화시키게 된다. 건축물이 가로의 보행환경에 어떻게 기여하도록 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공간적으로 전문적인 식견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각종 심의나 건축물의 규제에서 보행자를 위한 고려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해서 실질적으로 검토하고, 그 결과가 반영되어야 한다.
가로와 보행정책: 가로의 보도폭은 넓어지고 기능적으로 변화해야 한다. 보도에도 통행구역과 지원구역이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보행량이 많은 가로에서 차량에게 공간을 양보하는 일은 지양해야 한다. 넓은 차도를 적절하게 줄이는 대신, 보행자를 위한 공간을 확대함으로써 도시의 이동성과 쾌적성을 증진시키고자 하는 도시공간의 개선계획은 많은 도시에서 이미 시행하였고, 이러한 계획에 동참하는 도시들도 점차 늘어가고 있다. 우리나라는 보도가 설치되지 않은 이면도로의 연장이 매우 길고, 이면도로에서의 교통문제도 또한 심각한 수준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미 좁게 들어서 길에 보도를 설치하는 것을 무리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보차혼용의 개념을 적용한 보행자우선도로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필요성이 있다. 그것이 어렵다면 최소한 보차 구분없는 이면도로의 차량제한속도를 크게 낮추고, 보행친화적인 포장으로 아스팔트를 대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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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포틀랜드 보행자중심가로/자료=건축도시공간연구소]
법령과 보행정책: 많은 도시정부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부분 중 하나가 보행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령과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다. 오랜 기간에 걸쳐 많은 노력으로 설치한 우리 도시의 횡단보도에서 보행자가 처한 상황은 갈수록 열악해지고 있다. 거의 모든 횡단보도에서 우회전 차량은 정반 정도 차를 걸쳐놓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횡단보도에서 우회전을 상시허용하는 것은 매우 효율적이다. 이러한 차량은 보행자들로 하여금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심리적으로 압박감을 주고, 특히 거동이 불편한 노약자나 유모차, 휠체어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는 위협이 되기도 한다. 자전거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법령은 자동차 소통을 위주로 한 것이며, 보행자의 안전과 쾌적성에는 배려가 부족한 것이다. 신호가 없는 횡단보도에서도 차량의 양보를 의무화하지 못하고 있으며, 보차구분이 없는 도로에서는 차량진행방향과 반대로 가장자리로만 걷도록 하는 등 비현실적이고 불편한 통행방식을 법적으로 정하고 있다. 법적인 보호를 강화하지 않는다면 결국 보행자 개인이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으므로 상대적으로 차량에 비해서 느리고, 약한 보행자의 입장은 개선되기 어려울 것이다.
구체적인 보행정책지표의 제시: 보행정책이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매우 많은 유관정책이 함께 조율되어야 한다. 그러한 조율을 효율적으로 원활하게 달성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보행정책의 지표를 검토하고 제시할 필요성이 있다. 보행자-차량 사망자 0명 달성, 도시계획 등의 수립지침 개선, 건축심의 및 건축규제 등의 기준 개선, 보행자의 만족도 지표 제고, 대중교통이용 및 대기·환승 등에 대한 만족도 제고, 보도설계기준의 개선, 보행친화적 가로설계의 허용, 보행자 관련 법령개선 등 개별적인 사항의 중요도와 반영 정도를 살펴보면서 객관적인 지표와 주관적인 설문 등을 병행하여 구체적인 보행정책 지표의 묶음을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보행자를 위한 도시를 가꾸는 것은 도시성을 지키는 길이며, 도시의 많은 문제를 완화시키는 길이기도 하다. 안전하고 효율적이면서도 건강하고 아름다우며 함께하는 보행도시를 위해서는 개별적인 사업과 논의를 넘어서는 종합적인 도시 정책이 필요하다. 이전까지는 도시 정책에 있어 다른 가치들과의 접점을 크게 건드리지 않으면서, 보행환경의 개선이라는 테두리 내에서 가능성을 모색해왔다면 이제는 좀 더 다양한 차원에서 정책적 우선순위에 대한 폭넓은 논의를 함께 하면서 본격적인 도시 정책으로서의 추진을 도모해야 할 시기이다. 보도 자체를 산뜻하게 관리하는 일부터, 광역적인 도시공간의 구획에 이르기까지 여러 위계와 분야에 걸친 정책적 조율이 이루어질 때 보행환경의 실질적인 개선이 이루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