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도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전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양적·질적 성장을 거듭해온 대한민국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까지 암흑기를 거치면서 건설업의 눈부신 성장을 이어왔다. 현대건설, 삼성물산, 대림산업, 대우건설 등 무수히 많은 건설회사가 생겨났고, 건설기업들은 국내 건설 경제 발전에 크게 이바지 했다. 그러나 성공적인 건설회사와 달리 일부 건설사들은 업계 상위권을 유지하다 실적부진, 확장의 실수 등으로 해체되는 기업도 있었다. 건설업계의 커다란 족적을 남겼지만 심각한 상처를 남기게 됐는데, 대량의 실직자가 발생하거나 국가 경제의 손실을 입히기도 했다. 국민적 쇼크를 일으켰던, 한때 국내 건설업계를 호령하던 건설사들의 ‘몰락의 역사’를 재조명해본다.
국내공사 3800건·해외공사 120건 수주 리비아 대수로 공사, 동아건설의 상징 창립 51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져
광복 이후 1945년 8월 대전에 충남토건사가 설립됐는데 오늘날 동아그룹의 모체다. 창업주는 고 최준문 회장이다. 1953년 대전지방의 청라저수지, 남포간척지, 대전간척지 등 소규모 토목공사로 영위하던 충남토건사는 토목으로 기반을 굳히고 1957년 본사를 서울로 옮기면서 동아건설주식회사로 새출발 했다.
1962년부터 5년간에 걸쳐 제1차 경제 다목적 토목사업이었던 동진강 간척공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는데, 전라북도 부안의 계화도 인근 12.5㎞의 방조를 쌓아 새 땅을 만드는 공사로 명성을 높였다. 이 공사는 글로벌 건설회사의 기술로도 불가능하다고 했을 정도로 어려운 공사였다. 이후 왕십리발전소공사, 경부고속도로 공사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당시 동아콘크리트 사장으로 경영 수업을 받던 최 창업주의 장남 최원석씨가 건강악화로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동아그룹 회장직에 올랐다
1968년 관수물자의 하역수송 및 독점이권을 가진 국영기업 대한통운주식회사를 인수해 동아그룹 내 건설사업과 운송사업의 양자구도를 형성했다. 특히 정부가 대한통운을 민영화 하면서 동아건설에 경영권을 맡겼고, 대한통운은 인수된 지 3년여 만에 경영부실에서 벗어나 정상화 됐다.
1973년 투자회사인 동아종합상사를 건립해 무역업에 진출하고 기업을 주식 상장했다. 이후 동아건설이 중동지역에 진출하면서 세계시장으로 확장해 나갔다. 1975년 사우디아라비아에 지사를 설치한 후 리야드, 지다, 뉴욕, 도쿄, 런던 등에도 지사를 확장했다.
인류 역사상 최대 토목공사 리비아대수로 공사
1980년대 들어 동아건설은 당시 세계 최대 규모였던 36억 달러짜리 리비아 대수로 공사(Great Man-made River) 1단계 공사를 수주했는데, 1874km의 인공수로를 건설하는 대공사를 성공적으로 완공했다.
리비아 대수로 공사는 ‘세기의 기적’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대단했다. 이후 2단계, 3단계 공사까지 따내며 공사 수행능력을 인정받았다. 동아건설은 리비아대수로 공사를 통해 현대건설과 국내 최고 건설회사 반열에 올랐다.
지난 2009년 최원석 회장은 월간조선과의 인터뷰를 통해 리비아대수로 공사에 대해 이렇게 회상하기도 했다. “동아건설은 정말 대단한 회사였다. 국내 주요 발전소·댐·교량공사뿐만 아니라 내로라하는 해외 대형공사를 많이 수주했다. ‘동아건설’이 갖고 있던 프리미엄은 세계적이었고, 대수로 공사의 경우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가 내게 직접 브리핑을 하며 ‘1·2차뿐만 아니라 3·4·5차 공사까지 맡아 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리비아 대수로 공사로 100억 달러를 수주했다.”
동아건설은 창립 이후 3800건의 국내공사를 진행했고, 1974년 중동에 처음으로 진출한 후 120건의 해외공사를 수행했다. 특히 단일 토목공사로는 세계 최대 규모였던 리비아대수로 공사는 최원석 회장과 동아건설의 ‘상징’이었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동아그룹은 1997년 12월 기준 건설, 운송, 증권, 토건 등 22개 계열사를 설립해 재계서열 10위의 대기업으로 우뚝 섰다.
동아그룹은 기업이윤의 사회 환원 차원에서 1977년 공산학원을 설립해 대전 동아공고를 세웠고, 1990년에는 공산학원 소유의 임야(경남 양산시 소재) 238만㎡(72만 평)를 부산대에 무상으로 기증했다. 1996년에는 동아방송예술대학을 세웠다.
부채, 성수대교 붕괴…추락한 동아건설
그러나 동아그룹은 해외시장에서 인정을 받았지만 국내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국내 건설사들은 아파트 건축과 그룹 자체 공사로 상당한 양의 일감을 확보해 나간 반면 동아건설을 국내 재개발, 재건축 공사를 따는데 그쳤다.
당시 건설업계에 따르면 신축건설과 달리 이주비가 들어가는 재개발과 재건축 공사를 위해 동아건설은 제2금융권으로부터 막대한 단기자금을 차입한 것으로 알려진다. 무엇보다 1994년 무려 49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성수대교 붕괴는 시공을 맡았던 동아건설에 치명타로 작용된다. 또 외환위기까지 맞으면서 동아그룹은 한 순간에 휘청거렸다.
동아그룹의 주력기업이었던 동아건설은 1997년 전체 업종 기준으로 상위 16위, 건설업 기준으로 현대건설에 이어 2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러나 1998년 최 회장이 부실 경영의 책임을 지고 경영권과 1000억 원대의 재산을 내놓고 경영에서 물러났고, 동아그룹은 국내 최초로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대상 기업으로 최종 확정됐다. ‘동아건설을 제외한 모든 계열사를 매각해 경영을 정상화하라’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동아그룹은 최 회장이 물러난 후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되다가 2000년 11월 법정관리 대상기업으로 결정돼 퇴출됐다. 이후 2001년 5월 파산선고를 받으면서 55년 역사를 자랑하던 대형 건설사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이후 기업 이름만 남게 되자 2008년 프라임그룹에 인수된 동아건설은 파산 후 10년 만에 소규모 건설사로 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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