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토건사, 현대자동차공업사 병합 현대건설(주) 설립/자료=현대건설]
현대자동차그룹 산하의 종합 건설업체인 현대건설은 아파트 및 도로 건설 등 국내외 토목공사를 주요 사업으로 하고 있다. 현대건설의 전신은 1947년 5월 설립된 현대토건사로, 1950년 1월 현대토건사와 현대자동차공업사가 병합하면서 현대건설(주)이 설립됐다. 창업주는 ‘왕회장’으로 알려진 정주영 회장이다.
1915년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난 정주영 회장은 아버지의 길을 따라 농사꾼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의 아버지는 동네에서도 소문난 부지런한 농사꾼이었고, 정주영을 일등 농사꾼으로 키워낼 심산이었다. 육남매 중 장남이었던 정주영은 10살부터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농사일로 하루 종일을 보내야만 했다.
농사꾼의 삶을 못마땅해 했던 소년 정주영은 아버지가 궤짝 속에 넣어둔 소 판 돈을 훔쳐 기차를 타고 곧바로 서울로 올라갔지만 아버지에게 붙잡힌다. 19살이 되던 해 다시 고향을 떠난 정주영은 인천부두에서 하역 일과 막노동 등 무엇이든 달라붙어 일을 했다. 이후 쌀가게에 취직해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신용을 얻었고 일개 배달꾼에서 쌀가게 주인이 된다. 정주영의 나이 스물 세 살 이었다.
정주영은 가게 이름을 경일상회로 바꾸고 인근 학교 기숙사에 쌀을 대면서 조금씩 돈을 벌어 나갔다. 당시 경일상회의 수익은 꽤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일제가 쌀의 자유판매를 전면 금지하는 등 쌀배급제를 실시하자 경일상회도 문을 닫게 된다.
정주영은 일생을 걸 만한 사업을 고심하며 자동차 수리공장을 인수해 아도서비스를 만들었고 직공들과 함께 운영해 나갔다. 얼마 후 공장에 화재가 발생했지만 이에 좌절하지 않고 다시금 자동차 수리공장을 세워 다른 공장보다 수리기간을 단축시켜 신뢰를 쌓았다.
해방 직후 정주영은 1946년 4월 자동차 수리 공장을 다시 시작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했다. ‘현대’를 지향해서 발전된 미래를 살아보자는 의도에서였다고. 1947년 정주영은 현대자동차공업사 건물 내부에 ‘현대토건사’를 세워 건설업도 시작했다. 무모하다는 소리를 들으며 시작한 건설업이었지만 정주영의 생각은 달랐고, 1950년 현대토건사와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합병, 사옥을 필동으로 옮겨 현대건설주식회사로 새 출발을 하게 된다.
설립 초기에는 미군 부대에서 발주한 일이 대부분이었지만, 이를 기반으로 전후 기반시설 복구사업을 맡았고 1958년 5월 한강인도교 복구공사를 준공했다. 현대건설을 주축으로 우리나라 건설 현장에서 입지를 굳힌 정주영은 해외 진출을 생각하게 되었고, 1965년 태국 ‘파티니-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 공사’를 현대건설이 수주한 것은, 비록 적자를 보긴 했지만 우리나라 건설업 사상 획기적인 전기로 받아들여진다.
1966년 현대건설은 월남전이 한창이던 캄란만 군사기지 건설 공사에 참여, 태국 고속도로 공사 경험을 바탕으로 흑자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총탄이 오가던 전쟁지역에서 현대건설은 1년 만에 공사를 마무리 지었다. 이후 1967년 베트남, 1969년 미국, 1972년 파푸아뉴기니 등지에 주택 및 발전소를 착공하며 기술력을 확보하여 나갔다. 월남에서의 준설 공사 경험은 1970년대 중반 현대가 중동으로 진출해서 대규모 준설업자로 성장, 발전하게 한 초석이 되었다.
국내에서는 1970년 7월 경부고속도로, 1973년 10월 소양강 다목적댐 등을 준공하면서 주요 기반시설을 건설하는 데 참여했다. 특히 소양강 댐 건설은 1967년 정부가 소양강의 상류를 막아 대규모의 댐을 건설하기로 하고 입찰을 시도, 현대건설이 낙찰됐지만 이도 쉽지 않았다. 댐 건설 현장인 오지까지 콘크리트를 운반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정주영은 주변에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는 흙과 모래, 자갈을 이용해서 사력(砂礫) 댐으로 만드는 것이 콘크리트 중력 댐보다 훨씬 경제적이라 생각해 곧바로 설계를 바꿨다. 당시 수많은 이들에게 무모하다는 핍박까지 들으며 ‘사력댐은 실패할 것’이라 지적받았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의 생각은 달랐다. “북한의 폭격이 콘크리트 댐을 깨트린다면 무너지지만 홍수에만 잘 대처하면 사력 댐이 더 유리하다”는 박 대통령의 한마디에 결국 소양강 다목적 댐은 정주영이 제시한 대안으로 바뀌어 30% 가까운 예산을 절감한 것은 유명한 일화로 남는다.
또한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공사였다. 정주영은 이 고속도로 건설의 초창기부터 중요한 역할로 참여를 했다. 현대건설은 서울에서 오산까지의 105킬로미터, 대전에서 옥천까지의 28킬로미터를 합쳐 전 구간의 5분의 2만을 담당했지만, 경부고속도로 전체가 완공되기까지 그의 정성과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할 정도였다고 한다.
현대건설(주)의 해외 진출은 1970년대 중반 이후 두드러졌다. 현대건설에 따르면 1974년부터 1980년까지 이란·바레인·사우디아라비아 등지에 진출했고, 고속도로, 조선소, 해군기지, 항만공사, 발전소, 하수처리시설, 호텔, 정유공장 등을 건설했다. 1978년부터 1995년까지 월성 원자력발전소 1호기, 고리원자력발전소 1호~4호기, 영광원자력발전소 1~4호기를 준공했다.
이밖에 현대건설은 싱가포르 플라우 테콩 매립공사, 미얀마 나옹자트 다목적댐 공사, 말레이시아 페낭대교, 싱가포르 마리나센터, 홍콩 타이오 아파트, 필리핀 아시아 개발은행, 파키스탄 차스마 수력발전소, 스리랑카 스리랑카댐 등을 연달아 착공해 중동에 이어 동남아시아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현대건설의 아파트 브랜드 힐스테이트/자료=현대건설]
2006년 9월 현대아파트가 새로운 브랜드 ‘힐스테이트’를 공개하고 같은 해 11월 서울숲 힐스테이트를 선보였다. 2010년 6월 채권단이 현대건설(주) 매각 작업을 진행한 뒤 2011년 4월 현대자동차그룹으로 편입됐다. 2016년 전 세계 건설업계 최초로 다우존스 지속가능경영 지수가 4년 연속 1위로 선정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지난 2017년에는 2016년 영업이익이 업계 최초로 1조를 달성했다는 결과를 내기도 했다.
왕회장의 도전 “이봐, 해보기나 했어?”
무엇보다 정주영 회장은 사생활에서는 물론, 산업 현장이나 세계 어디에서도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밝혔던 대포가 큰 사나이였다. 그는 소학교 교육밖에 받아본 적이 없으면서도 풍부한 경험과 비범한 판단력으로 어느 누구와 맞붙어도 논리적으로 밀리지 않는 식견을 갖춘 모습을 보이곤 했다. 가족과 회사 임직원은 물론이고 고위 경제관료, 세계은행 관계자 등 모든 이들의 비웃음과 엄청난 반대를 무릅쓰고 허무맹랑한 상상으로 치부됐던 그 모든 일들을 “이봐, 해보기나 했어?”라는 한마디와 함께 도전에 옮겼다. 그리고 다른 기업들은 엄두도 못 내는 사업들을 과감하게 추진하고 성공시킴으로써 한국경제 산업화의 물꼬를 튼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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