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0년 초반 도시정비사업(재건축·재개발)은 ‘황금 알 낳는 거위’에 비유되며 건설업계는 소위 ‘대박’을 꿈꿨다. 재개발과 재건축 시장이 엄청난 개발이익과 더불어 투자의 광풍 수준으로 불어 왔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도심재생 뉴딜정책과 맞물려 도시정비사업은 또 다시 ‘투자 먹거리’로 등극해 시장은 크게 요동을 치고 있다.
그러나 큰돈이 몰리는 만큼 잡음 또한 커져 버렸다. 최근 정부의 재건축 비리근절 대책으로 ‘정비사업 시공사 선정제도 개선안’이 나오면서 관련된 건설사가 수사 사정거리에 맞닿아 있는 상황이다. 무엇보다 기대와 우려가 동시에 나오고 있는 상황. 이 대책으로 인해 재건축 정비사업의 투명성이 개선될 것이란 기대가 나오는 반면, 중견·중소 건설사는 수주의 적지 않은 타격을 입을 것이란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그동안 재건축 비리에 대한 강도 높은 제재가 없어 이번 대책으로 재건축시장에 질서가 확립된다는 장점도 나오지만, 정부가 정한 틀 안에서 자금력과 브랜드가 약한 중견·중소 건설사는 불리한 측면으로 작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불똥 튈라” 숨죽이는 대형 건설사
재건축 비리 근절의 칼을 빼든 정부와 검·경의 몸놀림이 빨라지고 있다.
국토교통부는 최근 일부 재건축 단지의 시공사 선정 과정에서 발생하고 있는 과도한 이사비 지급, 재건축 초과이익 부담금 지원, 금품‧향응 제공 등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차단하기 위하여, 입찰-홍보-투표-계약으로 이루어지는 시공사 선정 제도 전반에 걸친 제도개선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이와 맞물려 경찰이 지난 9월부터 처음으로 재건축 사업장에서 대형 건설사들의 금품 살포 행위를 수사하고 있는데,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재건축 비리와 관련해 서울 강남 4구(강남·서초·송파·강동) 재건축 사업장에서 시공권을 노리는 대형건설사들의 금품 살포 행위를 특별 수사하고 있다. 현재까지 현장 10여 곳의 혐의를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서울 전역으로 수사를 확대할 예정이다.
검찰 또한 재건축 비리를 뿌리 뽑기 위해 ‘건설범죄 중점수사청’ 설치를 계획해 지난 12월5일 서울북부지검이 이를 맡게 됐다. 당시 문무일 검찰총장은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청사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북부지검은 재건축 비리 등 건설범죄를 집중적으로 수사하게 될 것”이라며 “관련 업무의 집중도와 효율성,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 건설중점청으로 지정했다”고 말했다.
건설사들은 어느 대형 건설사부터 수사의 중점이 될 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한편, 이미 경찰이 대형 건설사들로부터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2017년 시공능력평가’ 순위 10위 안에 드는 대형 건설사 2곳의 임직원들을 소환해 조사하고 있는 중으로 알려지고 있다.
[정부와 수사기간이 재건축 비리 척결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자료=urban114]
이에 일부 대형 건설사들은 행여 다음 차례가 “우리가 아닐까”하는 긴장감에 휩싸여 있다. 무수한 추측과 소문이 난무하고 있는 상황이다. 일각에선 일부 건설사들은 수사에 대비해 만반의 준비 태세를 갖췄다는 얘기까지 돌기도 했다.
“투명한 수주전 기대” vs “수주 장벽만 높아져”
하지만 이 같은 대형 건설사의 긴장에도 불구하고 관련업계는 정부가 내놓은 ‘정비사업 시공사 선정제도 개선안’이 앞으로의 수주전에 투명성을 불어 넣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동안 만연했던 각종 비리들로 인해 불필요한 소모전을 치렀던 재건축 수주전이 해당 법규가 개선된다는 조건으로 인해 더욱 더 투명하고 공정해질 것으로 기대한다는 게 일부 건설업계의 설명이다. 과거에는 이번 개선안과 같은 강도 높은 제재가 없었다는 것이 업계 전문가들의 전언이다. 특히 예전처럼 수주를 하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재건축시장이 앞으로 질서가 바로 잡힐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러나 중소형 건설사들은 개선안에 대한 후유증을 걱정하고 있는 실정이다.
관련 업계, 언론보도 등에 따르면 정부의 재건축 시장 비리 근절 대책 마련으로 인해 최근 각종 입찰을 진행한 사업장 대부분이 잇따라 유찰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입찰에서 참여사 부족이 생긴 것이다.
지난 10월 마감한 서울 강동구 천호4구역 도시환경정비사업 시공사 입찰에서 A건설만이 입찰에 참여해 경쟁조건이 갖춰지지 않아 유찰됐다. 당초 이 구역은 총사업비가 약 2500여억 원에 달하며 규모와 입지가 좋아 여러 건설사들이 관심을 보였지만 정부의 비리근절 대책 발표 이후 입찰 제안서 단계에서 고려할 요소가 많아졌다는 후문이다.
대구 대현2동 강변주택 재건축 조합 역시 대형 건설사 한 곳만 입찰에 참여, 응찰사 부족으로 유찰됐고, 경기 안산주공5단지2구역 재건축 사업 시공사 입찰도 참가 부족으로 공중에 떠버린 신세가 됐다.
유명 컨설팅 관계자는 언론을 통해 “경찰과 검찰이 최근 재건축 비리 수사를 실시했고, 정부가 정비사업 시공사 선정 개선안을 발표하면서 대형 건설사들을 제외한 중소형 건설사들은 눈치만 보며 조심스러워 하고 있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자 치열했던 과거 수주경쟁의 투명성이 불어 닥칠 것이란 기대에 반해 중소형 건설사들은 재건축 시장이 오히려 위축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정부가 내놓은 비리 근절 제재는 대형 건설사만이 아닌 중소형 건설사들에게까지 파급력이 미치기 때문이다. 정부의 제재로 자금력과 브랜드만으로 입찰에 승부를 걸어야 하는 상황이 된다. 자금력과 브랜드 파워 만으로는 중소형 건설사들은 불리한 측면이 있을 수 있다.
대형 건설사들은 자금력은 물론 브랜드 파워가 막강해 상대적으로 약한 건설사들과 수주경쟁을 벌인다면 당연히 상대가 안 될 것이란 분석이다. 아파트를 예로 들면, 조합원 등 소비자들도 공사비가 비싸더라도 브랜드 아파트를 선호하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화 된 얘기다.
이는 곧 정부의 재건축 시장 비리 근절 대책으로 대형 건설사의 쏠림 현상이 늘고, 중소형 건설사들의 입지는 더욱 작아져 장벽만 높아진 수주전으로 흘러갈 것이란 분석이다. 비리의 사슬을 끊어야 하는 재건축 시장이지만, 정부와 수사기간이 중소형 건설사의 입장도 고려해야 한다는 게 일부 전문가들의 전언이다.